우리나라에서 화학분야에 기초를 마련한 고 이태규 박사에 대해 듣고 한국과 일본, 미국을 넘나들며 평생 학자로서의 품위와 기백을 지킨 박사의 업적을 배운다.

나는 씩씩하고 늘 품위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 읽어주기
한국인 최초로 화학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고 이태규 박사(1902~1992)는 최근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한국최초의 과학자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태규 박사님이 일본에서, 혹은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는데 한양대학교의 송상용 교수는 최근 한국 화학계의 큰 별-이태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1931년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태규 박사님은 교토대학 1년 후배인 도모나가와 2년 후배인 유카와가 노벨물리학상을, 제자되는 후쿠이가 노벨화학상을 받았으므로 그가 해방 후 귀국하지 않고 교토에 남아 연구를 계속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송상용 교수님은 “이박사님은 조선인이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43년 교토제국대학 정교수로 임명됐다??며 ??이는 그가 일본 학계에서 정상의 지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며 위의 학자들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태규는 어릴 적부터 자연 현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던 박사님은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만세를 부르고 고향에 내려가 있었으며 정치보다는 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하였고 북한의 대표적인 과학자인 리승기 박사와 같은 시기에 교토대학에 있었으며 사회적으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언제나 연구에만 몰두하여 평생 200편에 가까운 논문을 남긴 모범적인 과학자였습니다. 해방이 되어 서울대 문리과 대학 학장으로 제직하던 2년을 제외하면 평생에 걸쳐 오직 연구에만 정진한 학자였으며 일본과 미국에서 우수한 연구자로 성장하고 인정을 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학자로서의 기백을 지켜 끊임없는 정진을 한 결과였습니다. 고 이태규 박사님는 미국 유타대학에서 연구를 할 때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가훈을 ??Everlasting Effort??(끊임없는 노력)라고 번역하여 ??Keen Observation??(예리한 관찰)과 함께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항상 아침 9시에 연구실에 나아가서 새벽 1시까지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프린스턴 대학의 연구원으로서 아인슈타인·테일러·위그너등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함께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196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밸상 추천위원이 되었고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화학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고 이태규 박사님이 귀국을 하지 않고 계속 미국에서 연구를 했다면 또한번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함께 연구했던 동료 아이링 박사가 같은 분야의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계속 연구를 했다면 아마도 공동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73년 한국과학원 석학교수로 미국에서 귀국해 후배들을 지도했던 이태규 박사님은 과학자로서는 최초로 국립묘지에 계십니다. 젊은 시절 실험실에서 고 이태규박사님의 모습 고 이태규 박사님은 일본 식민지시기에 한국의 선구적인 과학자로서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일본인들을 가르치고 우리나라의 화학계의 토대를 닦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박사님입니다 해방이후 혼란한 시대에도 언제나 연구에만 몰두하며 대한화학회(창립 당시의 이름은 조선화학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서울대학교 화학과에는 여러 교원들을 초빙하여 당시 다른 학과에 비해 충실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여러 제자들을 배출하게 됩니다.